한국도시정비협회 이승민 회장

한국도시정비협회 이승민 회장 / 오엔랜드21 대표이사
한국도시정비협회 이승민 회장 / 오엔랜드21 대표이사

#1. 오랫동안 알아온 지인 한 분이 서울 외곽으로 이주했다. 어린 시절, 방학 때면 으레 시골 외갓집을 찾아 마음껏 뛰놀던 기억 때문인지 ‘언젠가는 꼭 각박한 서울생활을 접고 근교에서 유유자적하고 싶다’고 노래하던 분이다.

일찍부터 탄탄하게 입지를 굳힌 전문직 종사자이기에 진작 자신의 ‘로망’을 실현할 수 있었음에도 그 시기가 다소 늦어진 것은 가족 때문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남성의 배우자 가운데 전원생활을 동의하는 비율은 겨우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설문조사가 있다. 여성이 거주하는 지역의 인간관계와 문화생활, 편의시설 등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수성가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개천의 붕어’ 신세에 불과한 형편에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지인의 전원행에 대해 발목을 잡았었다.

캠핑도 가고, 휴가철이면 번잡한 관광지보다 한적한 시골마을의 민박집을 찾아가는 등 수년간 노력을 한 끝에 전원행에 대한 가족들의 동의를 이끌어 냈고, 자녀들이 성인이 되자 가족회의를 거쳐 살고 싶은 지역과 전원주택의 구조 등을 세심하게 논의한 끝에 드디어 전원주택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원주택 생활이 어떻냐’는 물음에 그는 ‘만족하고 또 만족한다’고 말한다. 서울 강남권 아파트를 처분한 돈으로 강북지역에 소형 아파트를 사서 아직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이 거주하도록 했고, 전원주택 부지를 사서 집까지 번듯하게 지었는데도 돈이 남았다고 한다. 출퇴근 시간이 좀 길어지기는 했지만, 조금 일찍 집을 나서고, 조금 늦게 들어가게 되었을 뿐 여가 시간은 훨씬 늘었다고 한다. 서울이라면 퇴근 후 술자리를 피하기 힘든 때가 많았는데, 집이 멀다는 핑계로 술자리로 크게 줄어 이래저래 좋아졌단다.

 

#2.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제13호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비가 전국적으로 내리고 있다. 주말까지 많은 비가 내릴 터이니 비 피해 예방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기상청의 당부도 있었다. 이틀 뒤에는 정비사업과 관련한 집회 하나가 시내에서 열릴 예정인데, 오늘보다 비가 더 올 것으로 예상돼 제대로 개최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정비사업 관련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이 시위는 분양가 상한제를 반대하기 위해 열린다. 주최측은 “시장기능을 부정하고 기존 주택물량의 1%에 불과한 재개발·재건축사업을 대상으로 한 분양가규제로 주택가격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국토부의 잘못된 신호가 신규주택에 대한 투기심리를 불러 일으켜서 주택가격을 끌어올리는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는 주택시장의 현황을 감안한다면, 정부의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를 통한 주택가격 안정정책은 단기 조정기간이 지나면 (조합원들의 부담만 가중시키고 로또분양자들에게 불로소득만을 가득 안긴 채 주요거점지역의 공급부족 사태 등으로 인해) 또 다시 실패할 것이 자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비사업 종사자의 한 명으로서 이 주장에 십분 공감한다.

정비사업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가 ‘국민의 주거안정’이다. 그런데, 정책당국은 정비사업이 주거안정을 해친다며 서슬 퍼런 규제의 칼날만 들이민다. 칼날에 베이기 싫다면 알아서 기라는 것이다.

정비사업도 ‘사업’이다. 이윤이 남지 않으면 추진할 동력 자체가 사라진다. 그런데 정책당국의 시각에서는 이 ‘이윤’이 ‘투기’로 인한 ‘초과이익’이니 규제 대상인 모양이다. 정비사업 현장에 투기세력이 전혀 없다고 하지는 않겠다. 아니, 오히려 투기목적으로 조합원 자격을 얻은 사람들 때문에 사업추진에 어려움을 겪는 현장들이 다수이다. 투기세력 근절은 조합과 조합원들이 더 반길 내용이다.

문제는 집이 낡아 재건축이나 재개발이 필요하게 될 정도까지 십 수 년 동안 한 자리에서 살아온 대다수 선량한 조합원들까지 도매금으로 투기세력이라 간주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살아온 ‘죄’로 투기꾼이 되었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비사업에 있어 사실상 분담금이 확정되는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받은 곳까지 소급하여 분양가 상한제를 적용시키겠다고 하니 국가가 나서서 정비사업장을 혼란으로 몰고 가는 것에 다르지 않다.

 

#3. 집값상승의 주범으로 꼽히는 게 재건축이다. 그런데, 재건축 아파트의 집값이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대 초반 서울 5대 저밀도지구 재건축 때부터다. 저밀도지구는 서울시의 ‘아파트지구개발 기본계획수립에 대한 규정’(1979년)에 근거를 둔 것으로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 시 쾌적한 주거환경을 조성키 위해 일부 블록의 인구밀도를 제한한 것이다. 서울시는 조례를 통해 잠실, 반포, 청담․도곡, 화곡, 암사․명일 등 5곳을 저밀도지구로 지정해 건폐율, 용적률, 높이 등을 제한했었다. 그러나 아파트 노후화가 진행되면서 재건축이 불가피해졌고, 결국 1995년에 저밀도 규제를 사실상 해제하게됐었다.

2000년대 초반 저밀도지역이 일제히 재건축을 추진하게 되면서 이들 지역의 아파트가격이 상승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재건축은 낡은 아파트를 허물고 새 아파트를 짓는 것이다. 신규아파트를 건립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정비사업이고, 당연히 신규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가격이 상승하자 각종 규제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서울시가 ‘저밀도지구의 재건축시 사업진행속도에 맞춰 이주 시점을 조정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가만히 놔뒀으면 사업장 여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정이 될 것을 인위적으로 규제하겠다고 하자 모든 사업장이 일제히 속도를 높이게 됐다. 결국 이주시점 조정도 실패했고, 주택가격 상승을 억제하는 것도 실패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이렇게 급등한 가격이 ‘재건축 불패’ 특히 ‘강남불패’라는 신화를 낳게 됐고, 지금까지 정비사업을 옥죄는 원죄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공급보다 가격 억제 일변도로만 정책이 집행되면서 수요와 공급의 곡선이 왜곡되는 참담한 ‘정책실패’의 책임을 정책당국이 아닌 국민이 지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정비사업은 나쁜 것’이라는 시각을 교정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수요와 공급은 왜곡되고, 주택가격은 상승하고 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주민들이 거리로 나서고, 정비사업 종사자들은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고 있다.

주택가격이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욕구를 가진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주택형태가 공급돼야 하고, 기반시설이 도시 외곽에도 차곡차곡 설치돼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주택수요가 분산돼 주거안정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서슬 퍼런 규제의 칼날을 디밀기보다 장기적으로 주거안정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정책당국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고민은 정비사업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종사자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귀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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