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대표 / (주)신한피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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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대표 / (주)신한피앤씨

SNS에 익숙한 요즘 젊은 세대를 표현을 빌리자면, 요즘 가장 ‘핫’하게 ‘뜬’ 단어가 있다. 결코 핫해서는 안 되고, 누구도 뜨는 것을 원치 않았던 단어, ‘갑질’이 그것이다.

십간(十干)의 첫째인 갑(甲)은 갑과(甲科)·을과(乙科)와 같이 등급을 매길 경우 첫째를 나타내며, 갑제(甲第)·갑족(甲族)과 같이 최상·일류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처럼 ‘으뜸’을 뜻하는 ‘갑’이라는 단어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이 붙어 만들어진 단어가 ‘갑질’이다.

‘갑질’을 이야기하자면 필연적으로 ‘갑을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갑을관계는 계약서 상에서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 용어였던 ‘갑(甲)’과 ‘을(乙)’에서 비롯됐다. 애초 갑을관계는 주종(主從)이나 우열, 높낮이를 구분하는 개념이 아니라 수평적 나열을 의미한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상하관계나 주종관계로 인식되고 있다. 수평적인 평등관계가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갑질’이라고 부르고 있다.

‘갑질’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갑질’이라는 단어만 검색해도 쉽게 알 수 있다. ‘갑질’과 관련된 기사와 각종 사례, 경험담 등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검색된다. 연관검색어도 갑질하다, 횡포, 비리, 기득권, 불공정, 부패, 탐욕, 권력, 갑을관계, 슈퍼갑, 대기업 등 부정적인 단어들이다.

최근 ‘갑질’이 부각된 것은 세월호 사건과 관련돼 국민의 대변인이어야 할 국회의원이 대리기사에게 행한 폭언 및 폭행 때문이다. 국민적 공분을 불러온 이 사건에 대해서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하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터인데,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갑질’이라는 단어가 확실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사실 이번 ‘갑질 국회의원’ 사건 이전인 지난해에도 ‘갑질’은 한바탕 물의를 빚은 바 있었다. 각각 ‘라면상무’와 ‘빵회장’, ‘조폭 우유’라 불리는 세 가지 사건을 두고 이른바 ‘갑질 3종 세트’라 말한다.

모 대기업의 임원이 비행기에서 라면에 설익었다며 항공기 승무원의 머리를 때리고(라면상무), 한 제빵업체의 회장이 좋아하는 자리에 주차 못하게 한다고 호텔 직원의 뺨을 때리며(빵회장), 우유업체의 직원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대리점주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붓는(조폭 우유) 사건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면서 ‘종속적 갑을 관계’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터져 나왔다.

‘갑질’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고조되자 대통령조차 “갑을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는가 하면 이번에 문제가 된 국회의원이 소속된 정당에서는 “을의 눈물을 닦아주고, 서민의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며 ‘을지로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음이 이번 ‘갑질 국회의원’ 사건으로 고스란히 드러났고, ‘갑질’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다시 한 번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다.

한 철학자에 의하면 권력의 피라미드로 올라갈수록 이른바 ‘진상’ 짓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며, 그 이유로 ‘특전을 당연하게 여기고, 행동의 바탕에는 뿌리 깊은 특권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 철학자의 말이 그저 하나의 ‘주장’이 아니라 ‘사실’임은 위에서 언급한 ‘갑질 사건’ 외에도 지난해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에서 벌인 성추행 등 일련의 사건, 최근 육군 사단장이 부하 여군을 추행한 사건 등에서도 명백하게 증명된다.

권력을 가진 자가 행하는 ‘갑질’과 관련해 한 과학잡지에 다음과 같은 실험 내용이 실린 적이 있다. 외국의 한 심리학자가 3명의 학생 중 2명에게 사회 현안에 대해 짧은 글을 쓰도록 하고, 나머지 1명에게는 다른 학생이 써 온 글을 평가하고 원고료를 결정하는 권한을 부여하여 팀 내의 상하관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이 심리학자는 간식으로 먹으라고 5개의 쿠키를 이들에게 주었다. 팀원은 3명인데 쿠키가 5개가 주어졌으니 1개씩 먹고 나면 2개가 남는다. 이때 사람들은 보통 4번째 쿠키에 쉽게 손을 뻗지 못한다. 자신이 4번째 쿠키를 집어먹으면 다른 2명에게 하나의 쿠키만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스(boss) 역할을 맡은 학생은 다른 두 명의 학생들보다 자연스럽게 4번째 쿠키를 집어들었다. 오히려 쿠키를 먹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과시하는 듯 입을 벌리고 쿠키를 씹어대며 입 주변과 테이블에 쿠키 부스러기를 잔뜩 흘렸다.

이처럼 비록 작더라도 권력을 가지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또 그것을 당연시한다는 것을 이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저 다른 학생이 쓴 글을 평가하라는 권한만 주었는데 쿠키를 혼자 2개나 먹을 권한까지 부여 받았다는 듯이 행동했던 것이다.

또, 이런 실험도 있었다고 한다. 한 심리학자가 자동차가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고 가정하고 4차선 도로에서 어떤 자동차가 자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부당하게 끼어들기를 많이 하는지 일일이 세어 봤다. 그런데 최고급 자동차 운전자들은 30% 넘게 끼어들기를 하는 반면, 가장 낮은 등급의 자동차 운전자들은 7~8% 정도 끼어들었다. 또한 가장 낮은 등급의 자동차 운전자들은 한 번도 횡단보도의 선을 밟지 않았으나, 최고급 자동차 운전자들은 무려 절반에 가깝게 횡단보도를 침범했다. 이 심리학자는 실험 방식을 달리 하여 참가자들에게 누군가가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려는 이야기를 읽게 하고 그 행동을 얼마나 따를 가능성이 있는지 적도록 했다. 그 결과, 스스로를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

실제로 운전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고급승용차, 그것도 외제승용차에 선팅이 진하게 되어 있는 차’일수록 난폭운전을 많이 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니, 이 심리학자의 실험결과 또한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류층일수록 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보다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나타날까? 그것은 아마도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적인 제약이 적고, 설령 비윤리적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들통이 날 가능성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제재를 대수롭지 않게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갑질’을 벌인 사람들 역시 대부분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발뺌을 하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본의가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것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라면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보유한 권력에 따른 특권을 ‘조금’ 누렸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냐는 심리가 그들에게 깔려있기 때문에 ‘갑질’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정비사업에 있어서도 ‘갑질’은 비일비재하다. 조합이 협력업체에게 도를 넘어서 요구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역으로 갑인 조합이 을, 하지만 ‘슈퍼 을’인 ‘시공자’에게 역으로 ‘갑질’을 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정비업체를 예로 들자면, 조합의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해주는 ‘컨설팅’ 역할을 해야 함에도 조합에게는 시공자를 뽑아 사업경비를 충당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금을 대여하는 역할쯤으로 폄하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정비사업에 있어서 가장 큰 ‘갑질’은 공공에 의해 벌어진다. 입법기관인 국회는 현실과 동떨어진 법 제․개정을 반복하면서도 법률의 저촉을 받는 사람들로부터의 의견은 애써 무시하고, 집행기관인 행정부는 현실을 개선하는 정책보다는 미봉책이나 땜질식 정책을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쏟아내기에만 바쁘고, ‘인․허가권’과 ‘관리감독권’을 갖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는 그들이 보유한 ‘재량권’을 빌미로 정비사업을 쥐락펴락 한다.

정비사업에 대한 공공의 대표적인 ‘갑질’은 과도한 기부채납, 주민에게 전가하는 세입자 대책, 가뜩이나 어려운 사업성을 더욱 악화시키는 임대주택 의무건립 등 사업주체인 조합과 조합원에게 불합리할 정도로 많은 짐을 강제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부담으로 인해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구정책’이라는 명목으로 구역지정 자체를 해제하는 등 주민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공공관리제를 도입하면 최소 세대당 1억원 이상 비용절감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면 늘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그럼에도 얼마 전 공공관리제도 시행 4년 성과를 발표하면서 공사비 절감, 투명성 증가 등 긍정적 효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는데, 정비업계에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만 골라 통계를 낸 ‘성과 부풀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만 나올 뿐 공공관리제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견해가 더 많다.

‘갑질’ 문제가 한창이던 지난 해 여름, 서울시는 시민과 투자·출연기관 등에 대한 공무원의 권한 남용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갑을 관계 혁신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혁신대책은 ‘갑을 관계 혁신 행동강령 제정, 제도 혁신, 소통 강화, 행태 개선’ 등 4가지로 구성됐고, ‘인허가·단속 등에서 자의적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방문이나 현장 확인 요구 등을 하지 않는다’ 등 공무원이 따라야 할 10가지 윤리지침을 담은 행동강령도 제정했다.

서울시의 이 같은 노력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지만, 이것이 그저 선언적인 노력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 반영되는 노력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민원인들에게 ‘귀’부터 열어놓아야 한다. 특히 정비사업에 대한 ‘삐딱한’ 시선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시선이 삐딱하니 현실을 직시할 수 없고, 듣는 귀조차 한쪽으로 쏠려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모든 ‘갑질’이 근절되어야 하겠지만, 정비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정비사업에 대한 부당한 ‘갑질’ 또한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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